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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23일 월요일

국가 안보를 우습게 여기더니

국가 안보를 우습게 여기더니

내 이럴줄 알았다.

고작 무기 갖고 장난만 치면 자주국방은 절로 되는줄 아나? 자주국방은 뭐 공짜로 이룩하는줄 아나???




국가 안보의 기본이자 근간은 바로 병역이다. 그런데 병역의 의무를 너무 우습게 봤다. 우습게 보기에는 젊은 남자들의 2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만만한게 아닐텐데???

국가 안보 알기를 무슨 지나가는 똥개 불알처럼 여기더니... 당연히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지. 국토방위를 위해 희생을 했으면 그에 합당한 댓가를 주던가...

군 가산점이 위헌이고 위법이면, 군대에서 2년간 활동한 것을 경력이나 호봉으로 인정해 주던가.

이건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그렇다고 월급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군대 다녀 왔다고 고생했다 라는 말 한마디를 해준 적이 있길 한가?

참 보기좋게 됐구나...

이승만의 성공 비결의 하나... 비서 윤치영

이승만의 성공 비결의 하나... 비서 윤치영

해방 정국에서 그 수많은 지도자들, 송진우, 여운형, 김구, 이범석, 김규식 등 많은 지도자들이 있었는데도 이들을 제치고 이승만이 성공하였다. 국내에 아무런 기반도 없었고, 출국한지 거의 50년이 다 되어가던 이승만이 일단 그들을 제치고 성공했다.

이승만이 미국에 가서 박사 학위와 석사 학위를 취득할 만큼 두뇌가 좋은 인물이었던 것은 틀림없으나, 그것 만으로 이박사의 집권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미군정은 우익을 밀면 중도파가 좌익에 가서 붙는다 하여 오히려 온건 우파인 김규식 박사를 밀기도 했다. 김규식 박사가 배짱이 없긴 했지만 그도 대통령이 되려는 마음은 있었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다가 미군정의 든든한 후광까지 있었다면야...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승만이 성공할수 있었던 요인의 하나로 나는 윤치영의 용인술을 들고자 한다.


체육을 좋아하였다.

사람을 쉽게 사귀는 방법은 운동을 하는 것인데, 윤치영은 평생 축구와 야구를 즐겨 했다. 고령의 나이에도 축구선수로, 야구선수로 뛰었고 골프도 즐겨 했다. 자연 함께 땀흘려 운동 하면서 가까워 지고, 더러는 스킨십도 하고,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도 체육 활동은 사람을 가장 손쉽게 사귈 수 있는 방법의 하나이기도 하다.

현대에 와서는 운동 외에도 게임이란 것이 있다. 게임을 두루 잘하는 것 역시 운동을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쉽게 사귈수 있는 것이다. 축구가 됐든 야구가 됐든 게임이 됐든, 여러 사람이 관심갖는 것을 한두가지 쯤은 잘 하는 것 역시 사람을 사귀는 하나의 방법이고 수단이다.


젊은 사람을 많이 사귄다.

자신의 나이나 지위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젊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나이를 가리지 않고 격식이나 격의를 따지지 않고 호형호제하며 친하게 지냈다.

사람이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지위가 있으면, 자신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들과의 접촉은 되도록 꺼리게 된다. 젊은이들의 모험심이나 무모함, 그리고 감정적인 대응 등이 사실 못마땅하거나 불안하기도 하다. 그러나 때로는 젊은이들의 치기에 '젊으니까 그럴 수 있다'라고 이해하고 넘어가줄 수 있는 아량이나 포용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어른이라 보기 어렵다.

어른이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고개숙이게끔 만드는, 저절로 존경심이 드는 존재가 진정한 어른이라 할 수 있다. 몸만 큰 어린애, 지극히 속이 좁고 편협한 사람이 나보다 나이를 더 먹었다 해서 저절로 존중하게 되거나 존경심이 드는 것은 아니다.

윤치영 역시 사람인 이상 이런 부담이 없었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자신보다 나이 차이 20세, 30세 이상 나는 젊은이들과 만나서 농담도 주고받고, 격의없이 대화를 하곤 했다.

나이나 지위를 따지지 않고 젊은이들을 가까이 했던 것... 1920년대에 미국에 있으면서 거의 조직이나 언변이 다소 부족하고 고집이 셌던 이승만 박사 주변으로 젊은이들을 많이 모여들게 했다. 이는 군정기 때도 큰 힘을 발휘하는데 이승만 박사 주변으로 젊은이들을 많이 모으는 요인이 됐다.

나이나 자신의 지위, 처지에 대해 대단히 권위적이었던 상해 임시정부라던가... 1956년 윤치영이나 임영신 등 동고동락하던 이들을 버리고 이기붕 일파만 독점 발탁한 말년의 이승만 박사라던가, 유신정권 후기 활기를 잃고 철저하게 폐쇄적이었던 말년의 박정희 정부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보자.



목표와 비전이 뚜렷하였다.

윤치영은 이승만을 찾아가 천황 겸 대통령 겸 아버지가 되라 하고 권고하였다. 그에게는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이 민족을 위기와 도탄에서 구해내야 된다, 그리고 우물안 개구리나 맹목적인 애국자 보다는 식견과 안목을 가진 자가 국가와 민족을 이끌어가야 한다 라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졸지에 반정부 인사(일제와 조선총독부 기준)가 되어 목에 현상금 60만 달러가 걸려있는데다가, 돈벌이 재주 조차 없어서 좌절한... 석사, 박사학위만 가졌지 반쯤 거지에다가 현상수배범으로 전락한 이승만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윤치영이었다.

1968년에 박정희는 3선 개헌을 하여 다시 대통령 선거에 나서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정희는 아직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았고, 패기와 야심을 갖춘 오너였다. '내 손으로 시작한 사업 내 손으로 끝내야겠다' 라는 말도 당당하게 할만큼 일에 대한 욕구가 넘쳤던 박정희였다.

이런 박정희에게 야당인사라는 작자들은 독재를 하려 한다, 영구집권을 꿈꾼다 등등... 온갖 중상과 비방을 늘어놓았다. 박정희는 1980년대 초반 쯤 물러날 계획을 이미 세운 터였다. 그리고 어쩌면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이 모험(중공업 육성과 건설 사업, 자주 국방 건설)을 실패할까 초조해지기까지 했다.

그런 가운데 윤치영이 68년 5월 돌연 기자회견을 열고 3선 개헌을 지지한다며 강력한 정부의 영도 하에 경제를 개발해야 함을 역설했다.

식자들... 특히 야당 인사들은 윤치영을 가리켜 아부꾼, 주책이라고 비웃고 욕했고, 심지어는 윤보선의 삼촌이라는 점까지 걸고넘어지며 그를 인신공격했고, 더 나가서는 좌옹 윤치호가 마지못해 귀족원의원직을 받은 것까지 언급하며 쑥덕대고 온갖 비방을 일삼았다. 별의 별 욕을 다 듣고도 그는 굴복하지 않고 3선 개헌에 찬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사람들을 설득해 나갔다. 그리고 3선 개헌은 겨우 통과되었다.

박정희 중심의 강력한 정부 하에 경제개발을 추진할수 있었던 배경에는 윤치영의 살신성인(?) 수준의 과감한 행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칠었지만 상당히 솔직하였다.

일단 내 사람이다 싶으면 철저하게 챙겼다.

때로는 거칠고 투박하기도 하지만 일단 내 사람이 되었다 싶으면 각별하게 챙긴다. 처음 봤을 때의 윤치영 씨는 꽤 딱딱하고 퉁명스러운 편이었다 한다. 가령 최기일 교수의 회고록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이란 책에는 처음 윤치영을 만나러 돈암장에 찾아간 청년 최기일에게 '웬놈이냐' 라고 하며 거만하고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일단 자기 사람이 되면 그의 생일이라던가,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각별하게 챙겼다. 6.25 전쟁 직후 서울이 점령됐을 때도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에도 몇몇 동지들을 함께 데리고 갔다. 전쟁의 혼란 중에도 혼자 피난가지 않고 이범석 일가를 데리고 가려고 찾아가기도 했다. 비록 이범석이 먼저 가솔들을 이끌고 떠났지만... 6.25 전쟁이 터진 뒤에도 그는 항상 주변 사람들을 챙겼다.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 하나에서 상대방을 감격시킬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

1920년대 미국 하와이에서 돈 한푼 없이 무일푼으로 독립운동을 할 때도 사람들이 대부분 이승만의 곁을 떠났지만 1935년 향수병으로 귀국할 때까지 한시도 이박사 곁을 떠나지 않고 그를 지켰던 사람 중의 하나가 윤치영이었다.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이런 저런 불평불만이 많았고, 더구나 외무장관직이 예정이었으나 조각 잘못으로 내무장관이 되는 등(박용만의 경무대 비화, 장택상의 대한민국 건국과 나 참조) 이런저런 불만이 있었으나 그는 묵묵히 장관직을 수행했다.

나중에 이승만이 개각을 하면서 외국의 대사로 나가 있으라고 할 때, 다른 각료들은 불평불만을 보이면서 거절했지만 그는 이박사의 입장을 고려해 프랑스 총영사로 5개월간 근무하고, 6.25 전쟁으로 소환되어 귀국했다.

어려운 처지였고 댓가가 시원치 않았음에도 불평불만 하지 않고 이박사를 신뢰하며 묵묵히 그 곁을 지켰다.

이승만 박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변변하게 여당도 없는 상태에서 임영신, 조봉암, 이인 등을 규합하여 대한국민당을 창당하여 사실상의 여당 역할을 하며 이승만 정부를 든든하게 뒷받침하기도 했다. 사람도 없었고 조직력도 금력도 없는 어려운 상태에서도 대한국민당을 운영하면서 이승만 정부의 정책을 시종일관 옹호 지지하였다.

그렇다고 측근에 있으면서 뇌물을 받거나 이권을 챙긴 것도 아니다. 고작 그가 이기붕 일파에게 밀려났을 때 이승만에게 바랬던 소박한 바람은 대학교 강단에서 강의를 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아닌게 아니라 이기붕 일파에게 밀려난 뒤로 1960년까지 중앙대학교 등지에서 교수와 강사로 정치학과 법학 등을 강의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반정부 인사(일제와 조선총독부에 저항했으니 반정부 망명인사...)로 어려운 생활흘 할 때부터 30년 넘게 이승만을 주변에서 모셨지만 어떠한 뇌물을 받거나 이권을 챙기지 않았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10년, 20년간 모신 댓가로 온갖 이권과 뇌물을 챙겨서 물의를 빚었던 자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윤치영의 위대성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체육을 좋아하고 젊은이들과 대화하기를 좋아했던 것... 그리고 거칠고 투박하면서도 솔직했던 것, 변함없는 신뢰를 보여준 것.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승만의 두뇌회전이 빨랐던 것도 있었지만, 측근들을 잘 둔 덕이 아닌가 싶다. 어떤 이는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가 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이나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에게 김규식을 지지하라고 명령한 것을 거절한게 이승만의 성공 요인이다 라고 하지만 그보다 이승만의 주변에는 다양한 정보통이 존재했다. 미국에 있을 때부터 그의 주변에서 이런 저런 소식을 전해주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리고 우리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는데 너희는 국내에서 비굴하게 굴복하며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권위적이고 고압적으로 대했던 임정 요인들의 권위주의적인 태도(이를 테면 우리 밑에 복종하기를 바랬던...)와 젊은이들을 많이 끌어모으지 못했다는 점이 아마 임정의 집권 실패 요인이 아니었을까?

자기 소신을 거침없이 말하던 허정이나, 이승만 박사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잘 따랐던 이기붕도 이승만의 성공에 크게 보탬이 되었다지만, 체육을 좋아하고 젊은이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던 윤치영의 공적도 그에 못지 않게 크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어려움에 처해서도 항상 변함없는 신뢰를 보여주었던 것 역시 젊은이들로 하여금 어려운 여건에 처해서도 자발적으로 이박사를 따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김문수 잘 했다

김문수 잘 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77&aid=0002773932&viewType=pc 유시민이나 안철수 그리고 자칫하면 경기도지사 나오려는 놈들 and 야당 놈들에게 좋은일 해줄 뻔 했다. 김문수는 아직까지 가능성은 보이는, 싹이 보이는 인물이지만 오세훈도 마찬가지... 그러나 아직 역량이 부족하다. 우선 자기 조직이 없고, 인맥이 없다. 그리고 박근혜 주변에는 노빠짓을 하면서 생사람을 매장시켰던 어떤 놈들도 지금 가 있다. 김문수가 지금 만약 박근혜에게 섣불리 도전했다가는 탈당이나 운지(노무현이나 장 모 목사님이 번지점프 하듯)하고픈 충동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김문수는 커녕 오세훈 조차도 박근혜를 이길 수가 없다. 거의 골수 광신도에 가까운 사이비 종교집단을 보유한 무리들을 김문수나 오세훈이 혈혈단신으로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한국은 민주주의나 이성 보다는 전체, 떼거지, 쪽수로 밀어붙이기 좋아하는, 동남아인이나 아프리카 흑인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야만인, 개떼들이 널린 곳이거늘... 그런 점에서 사퇴보류는 현명한 판단이 아닐수 없다. 차라리 박근혜 대신 고건이나 정운찬을 내세우고, 한 4,5년 정도 오세훈이나 김문수에게 장관직이나 공기업 단체장 같은 것 맡겨서 제왕수업, 후계자수업을 받게 한 뒤에 어느정도 내공을 키워서 내보낸다면 분명 저쪽의 전체주의, 파시즘, 빨갱이, 양아치, 선동가들을 이길 수 있는데... 이게 가장 이상적인 방안이긴 한데, 아마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http://lightzero.egloos.com/1678892 김문수가 지금 도지사 사퇴했다가 잘못하면 이런 더러운 좌빨 좀비놈들에게 좋은 먹이감만 될 뻔 했다.

2012년 4월 19일 목요일

외노자, 불체자 유입 원인의 하나

외노자, 불체자 유입 원인의 하나

외노자를 들여오고 불체자라도 받아들이게 만드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싼값에 노동인력을 쓸 수 있다는 것과 힘든 일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인력 부족이다.

외노자를 들여오고 불체자라도 받아들이게 만드는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인력부족... 20대, 30대들이 대학 나왔다는 자존심 때문에 공장에 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인터넷에 달라붙어서 정부든 누구든 깔 대상을 찾지못해 껄떡대는 20대 쓰레기들, 30대 쓰레기들이 수두룩 하다. 그들은 소위 대학을 나왔다는 마인드 때문에 절대 공장에 취직하거나 시장에서 장사 같은것 하지 않는다. 그때그때 편의점이나 레스토랑이나 패스트푸드점에서는 일을 한다. 그러나 공장에는 절대 안간다.

나는 대학을 나온 엘리트 라는 마인드 때문에 절대 공장 취직 안한다. 부모님에게 용돈 타서 쓰거나, 방구석에서 인터넷질이나 게임 하면 했지 절대 공장 안간다. 아쉬우면 그때 그때 알바 잠깐 해서 돈 모으고, 그 돈 떨어지면 그때 또 다른 알바 구한다. 차라리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교사 시험, 경찰 시험을 준비하면 했지... 절대 공장은 안 가려 한다.

이게 바로 대학을 나왔다고 하는 20대, 30대 젊은이들의 실체다. 그러면서 인터넷에 하루종일 달라붙어서 정치인들 욕이나 하거나 아니면 만화나 애니 쳐다보고 망상에 빠져서 산다.

주변에 20대 젊은이들... 80년대에 태어나서 도나개나 다 대학나와서 놀고먹는 인간들에게 왜 공장 안가냐고 물어보면 표정 굳거나 똥씹은 표정이 역력하다. 그러면서 내가 대학 나왔는데 왜 공장가려 하느냐... 이런다.

출퇴근길에 만나는 젊은이들 취직이 안되네, 먹고살 길이 막막하네 해서 왜 공장에 취직하거나 시장에 가서 장사할 생각 못하느냐 하면 오히려 '내가 대학 나왔는데 왜 공장가야 하느냐'고 악을 쓰고 덤벼든다. 공장에 가라 가 아니라 공장에 가보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투의 온건한 권유조로 말했는데도, 잘하면 살인까지 낼 기세더군...

하긴 어쩌다가 지나가다가 처음 보거나 어쩌다가 마주치는 인간이 왜 공장에 가볼 생각을 못하느냐 라고 했을 때 불쾌할 수는 있겠다. 자신의 아픈 곳을 찌르는 것이니까.

심지어는 제 친척 동생이나 조카뻘 되는 아이들에게 똑같은 소리를 해도 다들 내가 대학 나왔는데 왜 그렇게 힘들고 더러운 일을 하느냐... 이런 소리들을 되풀이 한다. 오히려 직접적으로 설명해봤자 친척간에 악감정만 생길까봐 그대로 입을 닫았다.

그러니 공무원 시험에나 도전하고, 그럴 여력 안되는 집의 대학나온 자식들은 대부분 방구석에 처박혀서 놀고 먹는다.

기업인들이 한국인 150~200 주는 돈으로 외노자나 불체자는 같은 임금을 주면 밤 11시, 12시. 심지어는 기숙사 생활 조건으로 24시간 풀로 부려먹을수 있기에 외노자나 불체자를 쓰는 것도 있지만, 우선 꼴에 대학 나왔다는 쓰레기 마인드를 갖고 공장에 가지 않는 젊은이들 때문에 인력난에 시달리는 것도 원인이다.

대학나왔다는 자존심 때문에 취직 안하고 인터넷에 달라붙어서 정치인들 욕이나 하는 쓰레기 20대들만 공장이나 시장에 가 주더라도, 공장이나 재래시장에서 외노자나 불체자들 데려다 쓰는 일은 절반 정도는 줄어들 것이다.

어떤 일이 있느냐 하면 요즘... 하도 20대, 30대 젊은남자들 취직해봤자 길어봐야 한두달 안에 때려치우고 하니, 아예 30대 이상 아줌마들을 데려다 쓴다. 비록 30대 아줌마들은 힘은 딸리지만 애나 남편 때문에 쉽게 안 그만둘 뿐더러, 요즘은 가죽의 압축이나 절단은 기계가 다 알아서 한다.

그나마 전자제품 공장(LCD, 부품, 납댐, 스피커 공장) 쪽은 덜한데, 염색공장이나 원단공장 쪽은 그정도로 인력난이 심하다.

제가 공장을 다녀봐서 알지만 그저 사무직 아니면 취직을 안하려는 쓰레기 마인드를 가진 20대들도 외노자, 불체자 유입에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30대 중반이 젊은 편이다. 그정도이다.

인권단체 까봤자 한계가 있다. 저런 쓰레기같은 마인드를 가진 20대, 30대들이 공장에 안 가는데 공장은 누구 데려다가 일 시키겠나?

그러면서 일자리가 없다고 투정이나 부리고... 하루종일 인터넷에 달라붙어서 정부든 누구든 깔 대상을 찾지못해 껄떡대는 20대 쓰레기들, 30대 쓰레기들이 수두룩 하다. 자신들 때문에 공장에서 외노자나 불체자들을 데려다 쓰는 것은 죽어도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 등꼴이나 빼먹거나, 등꼴 안뽑아도 방구석이나 전전하는 쓰레기같은 마인드를 가진 젊은이들...

외노자나 불체자를 데려오게 만드는 원인의 하나는 바로 공장 취직을 거부하는 쓰레기 마인드를 가진 20대들이다.

2012년 4월 11일 수요일

불체자, 외노자 옹호는 아니다.

불체자, 외노자 옹호는 아니다.

한국은 한국인의 나라이지 불법체류자나 외국인노동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나라는 아니다. 불법체류자나 외국인노동자들은 돈을 벌어서 한국을 떠난다. 조용히 있다 떠나면 모르지만 범죄를 저지르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범죄도 그냥 강도나 절도 정도면, 아 그냥 재수가 없어서 털렸나보다 하고 웬만하면 넘어가지만 살인까지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불법체류자나 외국인노동자들은 일단 돈을 벌면 한국을 떠날 사람들이다. 그러나 다수의 외노자나 불체자들은 달러돈이나 엔화로 바꿔서 나간다. 한국의 외환보유고만 줄어드는 것이다.

한국에 와서 돈을 벌어가는데 한국돈을 가져 간다면 오히려 한국에 이익이다. 그만큼 국제적으로 한국 화폐가 통용될 것이고, 한국 화폐의 유통이 외국에서도 많아진다면 달러나 일본원화나 중국원화 못지 않은 경제적, 정치적 가치가 생겨날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달러나 엔화로 바꿔서 나가니 결국 한국의 외환보유고만 줄어드는 것이다.

외국인노동자나 산업연수생은 그래도 합법적인 절차를 받고 입국하는 사람들이다. 범죄를 저지르면 그에 따라 처벌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불법체류자들은 아니다. 이들은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나 통제가 어렵고 범죄 이후 구제받을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점에서 위험요소이다.

더구나 아직까지는 미약한 수준이지만 외국인의 다량 유입 이후 문화의 차이,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문제 발생이 우려된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한국인 내국인과 동등하게 처벌하면 그만이지 필요 이상의 동정심이나 옹호 여론을 펼칠 필요도 없다. 차라리 한국민, 혹은 한국에 살려고 이민와서 정착하는 사람, 결혼이주여성이라면 모르겠지만 외노자나 불체자는 엄연히 외국인이다. 외노자나 불체자보다는 한국인의 권리를 지키는게 우선 아닐까?

인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외노자와 불체자의 유입 후의 후유증을 지적하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외노자나 불체자가 경기도 안산시내 전역이나 수원시내 변두리 등 소수 지역에 주로 많이 모여살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만 외국인의 수가 어느정도 눈에 띌 시점이 된다면 정부에서는 적극적으로 외노자나 불체자에 대한 단속, 통제 등의 대책을 세워야 된다.

투표를 안 하는것도 정치행위이다.

투표를 안 하는것도 정치행위이다.

투표를 하지 않는 것도 일종의 정치적 의사표현이다. 그리고 투표장에 가서 빈 용지를 접어서 넣는 것 역시 정치의사 표현이다. 굳이 헌법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투표 거부나, 투표 보이콧도 정치적 의사 표시의 하나인 것은 설명할수 있다.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인가? 투표의무나 투표강제가 민주적인 제도인가? 투표를 안하면 부도덕하다,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논리는 도대체 어떻게 나올 수 있는 건가.

투표권에는 투표를 하지 않을 자유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게 바로 기권이다.

고대 아테네나 로마에서 도자기 파편(도편)에 지도자나 원로원(의회) 의원을 선출할 때도 기권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자신들이 뭔데 그 기권 이라는 투표의 방법을 거부하는가?

싱가포르의 투표불참자 벌금제와 북한의 투표 불참자, 투표 거부자 구속, 처벌 등의 제도가 민주적인 제도인가?

기권 역시 민주적인 선거, 투표의 한 방법이고 권리이며 제도로 만들어진 것인데, 기권이나 투표거부, 투표포기를 공격하는 것은 파시스트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정치의 자유, 정확하게는 정치의사의 자유, 부작위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투표를 안하면 부도덕하다,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논리가 성립되는가?

정치의 자유, 정치 의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라는 것이 있다. 진짜 민주주의라면 나는 오늘 투표했지만 투표하지 않은 사람들의 정치적 의사를 존중한다. 라고 생각해야 정상이다.

투표포기는 반민주적 행태라니... 투표를 거부하거나 불참하는 것 역시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에 해당되는데 무슨 권리로 투표거부, 투표포기를 반민주적인 것으로 단죄하는가? 정치의 자유, 정치 의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부정하려는 것인가?

투표를 안 하는것도 정치행위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투표를 안하는 것을 마치 매국행위처럼 매도하는 작자들이 있다. 실로 무식한 발상이 아닐수 없다. 투표거부, 투표불참 역시 정치의 자유, 정치 의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 를 누리는 것이다. 투표거부, 투표불참도 하나의 권리이다.



ps : 찍을 사람이 없어서 투표를 거부하거나 불참하는 것 역시 정치의 자유, 정치 의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인데 이것을 정죄하려는 자들이 있다.

민주주의 사회라면 선거나 투표 못지 않게 정치의 자유, 정치 의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존중되어야 한다. 정치의 자유, 정치 의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전면 부정하는 자들과 그런 자들이 지지하는 정당은 "절대" 지지해서는 안될 것이다. 내 생명, 내 자유, 내 권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2012년 4월 6일 금요일

박정희 대통령의 뇌물 - 데이비드 심슨

 




故 박정희 대통령의 뇌물 
(맥도널드 더글라스社 중역의 증언)
 한국의 월남전 참전으로 소원해진 미국과의 관계가 다시 우호적이 
되었고,  한국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버리는 대가로 많은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만큼의 지원을 미국으로 부터 이전을 받게  된다. 
그 지원중의 하나가 "M-16 자동소총" 이었다. 
한국이 사용하는 무기는 단발식 카빈 소총으로서 M-16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되는, 그야말로 장난감과 같은 수준의 무기였었고 우리는 
그런 무기를 들고 남북대치 상황을 견디어 내어야만 했었다. 한국이 
월남전에 군사를 파병하는 조건으로 얻을 수 있었던 M-16의 제조 
수출업체는 맥도날드 더글라스社 였다.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으로의 수출 건을 따내게 된 뒤, 한국
을 방문한 맥도날드 더글라스社의 한 중역은 자신들의 무기를 수입
해주는 국가를 찾아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하게 된다.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것도 너무도 더웠던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나는(맥도날드 더글라스社의 중역) 대통령 
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박정희의 집무실로 걸음을 재촉 하게 된다. 
그리고 비서관이 열어주는 문안의 집무실의 광경은 나의 두 눈을 
의심케 만들었었다. 
커다란 책상위에 어지러이 놓여 진 서류 더미 속에 자신의 몸보다 
몇 배는 더 커 보이는 책상 위에 앉아 한손으로는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남은 한손 으로는 부채질을 하면서 더운 날씨를 이겨내고 
있었던 사람을 보게 되었다. 
한나라의 대통령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였었다. 
아무리 가난한 국가라지만 도저히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기 조차 힘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보았을 
때, 지금까지의 모순이 내안에서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손님
이 온 것을 알고 예의를 차리기 위해 옷걸이에 걸린 양복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그가 러닝차림으로 집무를 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미국 맥도널드 사에서 온 데이빗 심슨 씨입니다." 비서가 나를 
소개 함과 동시에 나는 일어나 대통령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먼 곳
에서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소, 앉으시오." 한여름의 더위 때문인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긴장 탓인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굳게 매어
진 넥타이로 손이 가고 있음을 알았다. 
"아, 내가 결례를 한 것 같소이다. 나 혼자 있는 이 넓은 방에서 그것도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에어컨을 튼다는 것은 큰 낭비인 것 
같아서요. 나는 이 부채 하나면 바랄게 없지만 말이오. 이 뜨거운 볕 
아래서 살 태우며 일하는 국민들에 비하면 나야 신선놀음 아니겠소." 
"이보게, 비서관! 손님이 오셨는데 잠깐 동안 에어컨을 트는 게 어떻
겠나?" 나는 그제야 소위 한나라의 대통령 집무실에 그 흔한 에어컨 
바람 하나 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만나봤던 여러 후진국의 대통령과는 무언가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 .  나는 그의 말에 제대로 
대꾸할 수 없을 만큼 작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아, 네. 각하." 비서관이 에어컨을 작동하고 비로소 나는 대통령과 
방문 목적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예정대로 나는, 내가 한국
을 방문한 목적을 그에게 이야기를 얘기했다. 
"각하, 이번에 한국이 저희 M-16소총의 수입을 결정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한국의 국가방위에 크게 도움이 되었
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들이 보이는 작은 성의.. . ." 나는 준비해온 
수표가 든 봉투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오?" 그(박 정희 대통령)는 봉투를 들어 그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흠. 100만 달러라.  내 봉급으로는 3대를 일해도 
만져보기 힘든 큰돈이구려." 차갑게만 느껴지던 그의 얼굴에 웃음
기가 머물렀다. 나는 그 역시 내가 만나본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사람임을 알고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 
실망이 처음 그에 대해 느꼈던 왠지 모를 느낌이 많이 동요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이 돈은 저희 회사에서 보이는 성의입니다, 그러니 부디.." 
대통령은 웃음을 지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하나만 물읍시다." 
"예, 각하." 
"이 돈 정말 날 주는 거요?" 
"각하, 맞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소." 
"네, 말씀하십시오. 각하." 
그는 수표가 든 봉투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되돌아온 봉투를 보며 의아해하고 있는 나를 
향해 그가 말했다. "자, 이돈 100만 달러는 이제 내 돈이오. 내 돈
이니까 내 돈을 가지고 당신 회사와 거래를 하고 싶소. 지금 당장 
이 돈의 가치만큼 총을 가져오시오. 난 돈 보다는 총으로 받았으면 
하는데, 당신이 그렇게 해주리라 믿소." 나는 왠지 모를 의아함에 
눈이 크게 떠졌다. 
"당신이 나에게 준 이 100만 달러는 내 돈도 그렇다고 당신 돈도 
아니오. 이 돈은 지금 내 형제, 내 자식들이 천리 타향에서 그리고 
저 멀리 월남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내 아들들의 땀과 피와 
바꾼 것이오. 그런 돈을 어찌 한 나라의 아버지로서 내 배를 채우
는데 사용할 수 있겠소." "이 돈은 다시 가져가시오. 대신 이 돈만큼
의 총을 우리에게 주시오." 
나는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일어나서 그에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각하. 반드시 100만 달러의 소총을 더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 나는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른 그의 웃음을 보았다. 
한나라의 대통령이 아닌 한 아버지의 웃음을. .   
그렇게 그에게는, 한국의 국민들이 자신의 형제들이요 자식들임을 
느꼈다. 배웅하는 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을 다시 한 번 둘러
본 나의 눈에는 다시 양복저고리를 벗으며 조용히 손수 에어컨을 
끄는 작지만 너무나 크게 보이는 참다운 한나라의 대통령으로 
보였다. 
나는 낯선 나라의 대통령에게 왠지 모를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 
= 당시 더글라스 맥도날드사의 중역 / 데이빗 심슨 올림 = 
 

=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