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성공 비결의 하나... 비서 윤치영
해방 정국에서 그 수많은 지도자들, 송진우, 여운형, 김구, 이범석, 김규식 등 많은 지도자들이 있었는데도 이들을 제치고 이승만이 성공하였다. 국내에 아무런 기반도 없었고, 출국한지 거의 50년이 다 되어가던 이승만이 일단 그들을 제치고 성공했다.
이승만이 미국에 가서 박사 학위와 석사 학위를 취득할 만큼 두뇌가 좋은 인물이었던 것은 틀림없으나, 그것 만으로 이박사의 집권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미군정은 우익을 밀면 중도파가 좌익에 가서 붙는다 하여 오히려 온건 우파인 김규식 박사를 밀기도 했다. 김규식 박사가 배짱이 없긴 했지만 그도 대통령이 되려는 마음은 있었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다가 미군정의 든든한 후광까지 있었다면야...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승만이 성공할수 있었던 요인의 하나로 나는 윤치영의 용인술을 들고자 한다.
체육을 좋아하였다.
사람을 쉽게 사귀는 방법은 운동을 하는 것인데, 윤치영은 평생 축구와 야구를 즐겨 했다. 고령의 나이에도 축구선수로, 야구선수로 뛰었고 골프도 즐겨 했다. 자연 함께 땀흘려 운동 하면서 가까워 지고, 더러는 스킨십도 하고,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도 체육 활동은 사람을 가장 손쉽게 사귈 수 있는 방법의 하나이기도 하다.
현대에 와서는 운동 외에도 게임이란 것이 있다. 게임을 두루 잘하는 것 역시 운동을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쉽게 사귈수 있는 것이다. 축구가 됐든 야구가 됐든 게임이 됐든, 여러 사람이 관심갖는 것을 한두가지 쯤은 잘 하는 것 역시 사람을 사귀는 하나의 방법이고 수단이다.
젊은 사람을 많이 사귄다.
자신의 나이나 지위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젊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나이를 가리지 않고 격식이나 격의를 따지지 않고 호형호제하며 친하게 지냈다.
사람이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지위가 있으면, 자신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들과의 접촉은 되도록 꺼리게 된다. 젊은이들의 모험심이나 무모함, 그리고 감정적인 대응 등이 사실 못마땅하거나 불안하기도 하다. 그러나 때로는 젊은이들의 치기에 '젊으니까 그럴 수 있다'라고 이해하고 넘어가줄 수 있는 아량이나 포용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어른이라 보기 어렵다.
어른이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고개숙이게끔 만드는, 저절로 존경심이 드는 존재가 진정한 어른이라 할 수 있다. 몸만 큰 어린애, 지극히 속이 좁고 편협한 사람이 나보다 나이를 더 먹었다 해서 저절로 존중하게 되거나 존경심이 드는 것은 아니다.
윤치영 역시 사람인 이상 이런 부담이 없었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자신보다 나이 차이 20세, 30세 이상 나는 젊은이들과 만나서 농담도 주고받고, 격의없이 대화를 하곤 했다.
나이나 지위를 따지지 않고 젊은이들을 가까이 했던 것... 1920년대에 미국에 있으면서 거의 조직이나 언변이 다소 부족하고 고집이 셌던 이승만 박사 주변으로 젊은이들을 많이 모여들게 했다. 이는 군정기 때도 큰 힘을 발휘하는데 이승만 박사 주변으로 젊은이들을 많이 모으는 요인이 됐다.
나이나 자신의 지위, 처지에 대해 대단히 권위적이었던 상해 임시정부라던가... 1956년 윤치영이나 임영신 등 동고동락하던 이들을 버리고 이기붕 일파만 독점 발탁한 말년의 이승만 박사라던가, 유신정권 후기 활기를 잃고 철저하게 폐쇄적이었던 말년의 박정희 정부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보자.
목표와 비전이 뚜렷하였다.
윤치영은 이승만을 찾아가 천황 겸 대통령 겸 아버지가 되라 하고 권고하였다. 그에게는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이 민족을 위기와 도탄에서 구해내야 된다, 그리고 우물안 개구리나 맹목적인 애국자 보다는 식견과 안목을 가진 자가 국가와 민족을 이끌어가야 한다 라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졸지에 반정부 인사(일제와 조선총독부 기준)가 되어 목에 현상금 60만 달러가 걸려있는데다가, 돈벌이 재주 조차 없어서 좌절한... 석사, 박사학위만 가졌지 반쯤 거지에다가 현상수배범으로 전락한 이승만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윤치영이었다.
1968년에 박정희는 3선 개헌을 하여 다시 대통령 선거에 나서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정희는 아직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았고, 패기와 야심을 갖춘 오너였다. '내 손으로 시작한 사업 내 손으로 끝내야겠다' 라는 말도 당당하게 할만큼 일에 대한 욕구가 넘쳤던 박정희였다.
이런 박정희에게 야당인사라는 작자들은 독재를 하려 한다, 영구집권을 꿈꾼다 등등... 온갖 중상과 비방을 늘어놓았다. 박정희는 1980년대 초반 쯤 물러날 계획을 이미 세운 터였다. 그리고 어쩌면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이 모험(중공업 육성과 건설 사업, 자주 국방 건설)을 실패할까 초조해지기까지 했다.
그런 가운데 윤치영이 68년 5월 돌연 기자회견을 열고 3선 개헌을 지지한다며 강력한 정부의 영도 하에 경제를 개발해야 함을 역설했다.
식자들... 특히 야당 인사들은 윤치영을 가리켜 아부꾼, 주책이라고 비웃고 욕했고, 심지어는 윤보선의 삼촌이라는 점까지 걸고넘어지며 그를 인신공격했고, 더 나가서는 좌옹 윤치호가 마지못해 귀족원의원직을 받은 것까지 언급하며 쑥덕대고 온갖 비방을 일삼았다. 별의 별 욕을 다 듣고도 그는 굴복하지 않고 3선 개헌에 찬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사람들을 설득해 나갔다. 그리고 3선 개헌은 겨우 통과되었다.
박정희 중심의 강력한 정부 하에 경제개발을 추진할수 있었던 배경에는 윤치영의 살신성인(?) 수준의 과감한 행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칠었지만 상당히 솔직하였다.
일단 내 사람이다 싶으면 철저하게 챙겼다.
때로는 거칠고 투박하기도 하지만 일단 내 사람이 되었다 싶으면 각별하게 챙긴다. 처음 봤을 때의 윤치영 씨는 꽤 딱딱하고 퉁명스러운 편이었다 한다. 가령 최기일 교수의 회고록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이란 책에는 처음 윤치영을 만나러 돈암장에 찾아간 청년 최기일에게 '웬놈이냐' 라고 하며 거만하고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일단 자기 사람이 되면 그의 생일이라던가,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각별하게 챙겼다. 6.25 전쟁 직후 서울이 점령됐을 때도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에도 몇몇 동지들을 함께 데리고 갔다. 전쟁의 혼란 중에도 혼자 피난가지 않고 이범석 일가를 데리고 가려고 찾아가기도 했다. 비록 이범석이 먼저 가솔들을 이끌고 떠났지만... 6.25 전쟁이 터진 뒤에도 그는 항상 주변 사람들을 챙겼다.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 하나에서 상대방을 감격시킬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
1920년대 미국 하와이에서 돈 한푼 없이 무일푼으로 독립운동을 할 때도 사람들이 대부분 이승만의 곁을 떠났지만 1935년 향수병으로 귀국할 때까지 한시도 이박사 곁을 떠나지 않고 그를 지켰던 사람 중의 하나가 윤치영이었다.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이런 저런 불평불만이 많았고, 더구나 외무장관직이 예정이었으나 조각 잘못으로 내무장관이 되는 등(박용만의 경무대 비화, 장택상의 대한민국 건국과 나 참조) 이런저런 불만이 있었으나 그는 묵묵히 장관직을 수행했다.
나중에 이승만이 개각을 하면서 외국의 대사로 나가 있으라고 할 때, 다른 각료들은 불평불만을 보이면서 거절했지만 그는 이박사의 입장을 고려해 프랑스 총영사로 5개월간 근무하고, 6.25 전쟁으로 소환되어 귀국했다.
어려운 처지였고 댓가가 시원치 않았음에도 불평불만 하지 않고 이박사를 신뢰하며 묵묵히 그 곁을 지켰다.
이승만 박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변변하게 여당도 없는 상태에서 임영신, 조봉암, 이인 등을 규합하여 대한국민당을 창당하여 사실상의 여당 역할을 하며 이승만 정부를 든든하게 뒷받침하기도 했다. 사람도 없었고 조직력도 금력도 없는 어려운 상태에서도 대한국민당을 운영하면서 이승만 정부의 정책을 시종일관 옹호 지지하였다.
그렇다고 측근에 있으면서 뇌물을 받거나 이권을 챙긴 것도 아니다. 고작 그가 이기붕 일파에게 밀려났을 때 이승만에게 바랬던 소박한 바람은 대학교 강단에서 강의를 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아닌게 아니라 이기붕 일파에게 밀려난 뒤로 1960년까지 중앙대학교 등지에서 교수와 강사로 정치학과 법학 등을 강의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반정부 인사(일제와 조선총독부에 저항했으니 반정부 망명인사...)로 어려운 생활흘 할 때부터 30년 넘게 이승만을 주변에서 모셨지만 어떠한 뇌물을 받거나 이권을 챙기지 않았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10년, 20년간 모신 댓가로 온갖 이권과 뇌물을 챙겨서 물의를 빚었던 자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윤치영의 위대성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체육을 좋아하고 젊은이들과 대화하기를 좋아했던 것... 그리고 거칠고 투박하면서도 솔직했던 것, 변함없는 신뢰를 보여준 것.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승만의 두뇌회전이 빨랐던 것도 있었지만, 측근들을 잘 둔 덕이 아닌가 싶다. 어떤 이는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가 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이나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에게 김규식을 지지하라고 명령한 것을 거절한게 이승만의 성공 요인이다 라고 하지만 그보다 이승만의 주변에는 다양한 정보통이 존재했다. 미국에 있을 때부터 그의 주변에서 이런 저런 소식을 전해주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리고 우리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는데 너희는 국내에서 비굴하게 굴복하며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권위적이고 고압적으로 대했던 임정 요인들의 권위주의적인 태도(이를 테면 우리 밑에 복종하기를 바랬던...)와 젊은이들을 많이 끌어모으지 못했다는 점이 아마 임정의 집권 실패 요인이 아니었을까?
자기 소신을 거침없이 말하던 허정이나, 이승만 박사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잘 따랐던 이기붕도 이승만의 성공에 크게 보탬이 되었다지만, 체육을 좋아하고 젊은이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던 윤치영의 공적도 그에 못지 않게 크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어려움에 처해서도 항상 변함없는 신뢰를 보여주었던 것 역시 젊은이들로 하여금 어려운 여건에 처해서도 자발적으로 이박사를 따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